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문단 편집) == 1944년 1월의 상황 == 1944년 1월,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계급)|원수]]의 [[독일 국방군|독일군]] 남부집단군은 [[드니프로 강|드네프르 강]] 서안으로 밀려나 판터-보탄 방어선을 유지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기갑총감 [[하인츠 구데리안]]의 끝없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동부방벽(Ostwall) 건설은 '병사들이 후퇴할 빌미를 제공한다.' 하여 반대해 왔다. 그 결과, 드네프르 방어선상의 판터-보탄 방어선은 대부분 콘크리트도 없는 유개호로 만들어진 경우가 다반사였고, 결국 드네프르 강 방어선은 1943년 말 소련군의 계속된 공세로 대부분 붕괴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itlerdnieper.jpg|width=100%]] ▲ 대충 만든 이런 엉성한 방어선은 그대로 붕괴되었다. [[소련군]]이 1943년 12월에 [[키이우|키예프]]를 탈환하고 키예프 서쪽으로 돌출부를 확대하는 데 성공하자, 만슈타인은 전선을 후퇴시켜 남부의 [[니코폴(우크라이나)|니코폴]] 광산을 포기하고 집단군 중점을 중부집단군과 연결할 수 있는 북부, 4기갑군 지역에 둘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니코폴 광산은 독일 전시 경제에 필수적이며, 단 한 치의 땅도 내 주지 말라며 요지부동이었다.[* 구데리안은 예전에 드네프르 상류 석탄광과 철광에 대해서도 똑같은 소리를 했다며 빈정거렸다.] 히틀러의 결정에 따라, 니코폴 북쪽으로는 늘어날 대로 늘어난 전선을 지친 보병사단들과 기갑사단들이 지켜야 하게 되었다. 남부집단군 소속 빌헬름 슈팀머만 [[대장(계급)|대장]]의 제42군단과 테오발트 리에브 [[중장]]의 제11군단은 B 분견군을 형성하여 체르카시 서쪽 코르순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토 뵐러 [[상급대장]]의 제8군 전방에서 소련군의 드네프르 강 도하를 막고 있었다. 두 군단은 마지막 남은 드네프르 강 방어선이라는 이유로 위치를 절대 사수해야만 했다. 히틀러는 이 지역은 훗날 반격에 중요한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이들은 망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무렵, [[스타프카]] 대리로 파견되어 우크라이나전선군들을 통합 지휘하고 있던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는 제8군과 B분견군 사이의 틈으로 공세를 가한다면 B분견군을 코르순과 체르카시에 포위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주코프는 자신의 작전 계획을 스타프카에 보내며 승인을 요청한다. 주코프의 작전안에 따르면 [[니콜라이 바투틴]] [[대장(계급)|대장]]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과, [[이반 코네프]]의 제2우크라이나전선군 소속 전차군들이 체르카시와 코르순에 대한 2중 포위망을 형성할 것이었다. 내부 포위망은 B분견군을 직접적으로 포위망 안에 가두며, 외부 포위망은 갇힌 독일군의 탈출 기도를 차단할 것이다. 만슈타인은 2개 군단이 포위당할 것이라며 히틀러에게 후퇴 요청을 했지만, 늘 그랬듯 만슈타인의 요청은 거절당한다. 주공은 코네프의 제2우크라이나전선군이 맡았으며 코네프는 제53군, 제4근위군, 제5근위전차군을 체르카시 남서쪽에 투입시키고 후속으로 제52군, 제5근위기병군단, 제2전차군을 투입시킬 것이었다. 바투틴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제27군과 제40군, 새롭게 편제된 제6전차군을 북서쪽에서 투입시킬 것이었다. 당시 소련군은 독일군이 포위 기도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판단했지만, 독일 제8군 참모들은 어느 정도 소련군의 기도를 눈치챈 상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